
저는 이 작품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펑펑 울기도 했고, 작가 분 분위기가 워낙 좋기도 하고. 문제는 역시 역사라는 거겠죠. 저는 26년 같은 팩션 정말 싫어하는데, 어떻게 보자면 이 작품도 좀 더 그럴듯한
기분나쁜 팩션으로 보이기도 하니까요.
그 지점에서 과연 이 작품을 옹호할 수 있을지, 물론 옹호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좋아하는 작품은 좋아할 따름이니까요. 무슨 얘기냐면 감상으로 이야기되는 얘기는, 사실 이 작품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따라서 그 다음에 재구성될 뿐이라는 겁니다. 저는 감상을 그렇게 바라보기에, 사실 감상을 별로 안 믿습니다. 논리적인 감상은 없다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감상이 막 쓰는 글이라는 건 아니고, 제가 이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과 왜 좋아하는지를 접할시킬 묘안이 지금으로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문제는 이 작품이 억압을 더 강화하고 있는지,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인지가 되겠죠. 작가 분은 스스로를 원폭과 관련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망령으로만 남아있는 원폭을 직시하고자 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일본이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강화시키는지, 아니면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인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저는 비교적 후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도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 <벚꽃의 나라>에서는 원폭이란 말만 들어도 고개를 돌렸던 2년 전의 내가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을 그려 보려 했다. 나도 그랬었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100p)
무슨 얘기냐면, 원폭은 특히 피해자 중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심지어는 그 근처에 있었던 ㅡ 바로 작가 분과도 같은 ㅡ 사람들마저도 기묘한 죄의식을 마음에 품게 만들었다는 거죠. 이건 단순히
저녁뜸의 거리에서 미나미가 죽어가는 장면도 혹은 그녀가 느꼈던 그 죄의식만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즉,
벚꽃의 나라로 넘어와서는 현재진행형으로 다뤄지는 테마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 오직 부정되어져야할 정체성에 대해 직시를 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죄의식에 대해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요. 이걸 가지고 일본이 피해자네 어쩌네 할 수 없다고 보는 건, 이건 분명 일본인 안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문제이고, 치열한 문제일 수 있으니까요. 이 작품을 보면서 진짜로 서글펐던 이유는 전반에 깔려있었던 그 죄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나미가 왜 그 마을에서의 추억을 잊어버리려 했는지가 바로 그렇습니다. 또한 미나미의 독백 역시 원폭에 대한, 미국에 대한 단순한 독설만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단지, 그것을 통해서 구체화되었을 뿐이죠 ㅡ 그건 분명 사실이죠. 그러한 살아남고
말았다는, 그리고 그들의 피를 이어간다는 죄의식은,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고유의 문제이자 그것이 드러내는 원폭 문제의 핵심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이 작품은 전쟁 문제 이전에 원폭 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것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신성화라거나 억울함에 대한 호소라기보다는 내면화된 죄의식에 관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저는 코우노 후미요 씨가 그 죄의식에 반대한다고 생각하고, 저는 그 반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의 가해자로서의 입장을 숨기려는 게 아니냐는 건데, 이런 입장의 글도 이미 몇 건인가 읽었습니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죠. 저는 어차피 이 작품의 문제의식에 한국인이 반드시 동의해야한다고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본인에겐, 좀 더 범주를 좁히면 히로시마 사람들에게는 치열할 수 있는 문제도, 당장에 우리 자신의 살에 맞닿아 있는 문제조차 아니니까요.
하지만, 뒤집어엎어서 말한다면 작가 분에게 그것이 하나의 억압이고 무거운 짐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바로 그 분노에 겹쳐져 보인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저는 한국인이 일본인을 싫어해야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억압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만, 저는 이 작품에서 주목할 부분이 죽어가는 미나미를 통한 단순한 비극의 환기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ㅡ 즉, 피해자로서의 정체성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피해자라고? 비극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럴까요. 그러니까 좀 더 기본적인 것, 그것은 비극이기 이전에 분명히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마치 없던 것처럼, 아니 없어야 했었던 것으로 치환해버렸을 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없어야만 했던 상상 위에서 현실은 소외되어버리는 거죠. 그런 내용없는 죄의식(혹은 의무). 그리고 거기에서 과거는 스스로를 절대화하고, 사고는 정지하기를 요구하죠.
재미있게도 이 작품이 불쾌하고, 의도를 까발리고 싶어진다면, 그것도 바로 그런 억압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잘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한국인을 짓누르는 것도 일제시대에 자체가 아니라 일본이 무조건 잘못했다거나 일본을 미워해야 한다는 요구에 다름 아니니까요. 어느 쪽이건 사실은 내용이 없어요. 이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던 죄의식에도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일본을 미워해야 한다는 의무에도 말이죠. 남는 것은 의무이고 구도 뿐이죠. 일본에, 그리고 역사에 관련있기만 하면, 한국-피해자, 일본-가해자 구도에 쑤셔넣고 싶어지는 거죠. 그런데,
일본이 피해자라고라!?
피해자로 그려지면 또 어떱니까, 무슨 피해자 강박증도 아니고. 아 피해자적 민족주의란 바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저 테마를 좀 더 한국적으로 뒤집어본대도, 과거에 대한 인정을 통해서 이런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거죠. 죽은 사람은 되돌아오지 않고, 일제시대라는 과거도 달라질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비로소 바라보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이 작품이 과거에 대한 얽매임이 아니라면, 일본을 피해자로 파악하는 것도 가해자로 파악하는 것도 사실은 별 상관없다는 거죠. 논점은 그게 아니거든요.
물론 이 작품이 놓인 맥락을 놓고 생각했을 때, 순전히 그렇게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유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저 역시 이 작품을 온전히 좋아할 수 만은 없으니까 문제인 셈이죠. 저에게 문제가 되는 건 일본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숨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억압을 강화한다는 데 있죠. 어떠어떠해야한다, 는 바로 그겁니다. 무슨 얘기냐면 다른 모든 사고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겁니다. 이를 테면 민족주의에 이걸 적용하면 일본에 대한 옹호가 있을 때, 그것은 의견이 아니라 매국이 되는 거죠. 바로 그렇기에 이 작품의 위치가 고민되는 셈이고,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이렇게 놓고 보면, 제 입장에선 스스로 가해자라는 정체성을 끌고나오는 거야 말로, 이 작품을 최악으로 만드는 지름길이긴 하겠네요. 앞서 26년을 싫다고 이야기했는데 비슷한 거죠. 피해자들의 아픔은 절대적이고, 그 때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는 거죠. 저는 바로 그런 게 싫은 거거든요.
저는, 그러니까 울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이건, 일본 사람이건 작가분이 남겨둔 결말없는 이야기의 마지막장에, 이를 갈면서 분노하고자 한다면, 작가 분이 남겨둔 이야기의 가능성과는 가장 먼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그 공백은 다름아닌 독자의 삶을 지칭하는 거라고 생각되니까요.
물론 이 이야기가 제 상상이라면, 그것도 그렇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