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는 멀대 같이 크면서도 멍한 성격에 신뢰받지 못 하는 사무라이 아키츠 마사노스케. 고향으로 보낼 돈은 필요하고, 그렇다고 사무라이로서 할 수 있는 경호 일은 맡으면 얼마 못 가 짤리기 일쑤, 그렇게 가난에 찌들어있는 아키츠가 야이치라고 하는 신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는 없는 그 여유로운 풍채에 이끌려, 그가 맡긴 일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고 마는데, 그, 야이치는 사람을 납치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일당이었다는 이야기.

LA QUINTA CAMERA가 공간을 뛰어 넘어 멀리 이탈리아의 이야기였다면 고요 쪽은 시간을 뛰어넘어 어느 사무라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납치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다지 고요라는 집단이 의적이라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아키츠의 질문에 야이치는 딱 잘라 대답해주지만, 그는 이 일을 돈 목적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런 와중에 그곳도 여전히 사람 사는 곳, 그 순진무구한 아키츠는 여전히 야이치의 권유에 갈등하고 있는 듯 하면서도, 그 고요라는 틀 안에 알게 모르고 어울려 지내게된다. 심지어 나중에는 다른 경호일을 맡은 와중에 자신도 모른채 고요를 도와주는 일이 돼버리기도 한다.

납치라는 것은 분명 그렇게 유쾌한 소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물며 상대의 사정을 봐서 건드린다고는 한들, 악업은 악업. 당시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 시대에는 특히나 사람을 잡아두고 돈을 챙기는 것은 최악의 범죄 중에서도 질이 나쁜 범죄의 하나니까 말이다. 범죄자의 쪽에 있으면서도 그렇기에 이 이야기를 이야기로 만드는 건, 아키츠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어벙한 사무라이는 그 고요라는 납치꾼들에 구멍을 내고 있는 거다.

분명 직접적으로 집요하게 쫓아가고 있는 주제인 듯도 하지만, 아마 아키츠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이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뭐 그건 앞서서 '돈'이라는 걸 언급해두기는 했지만, 이런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야이치에 대해서 그렇고, 이건 계속되는 전개에 기대하도록 미뤄지기는 했지만, 아키츠는 분명 거기에 의문을 품고있다.

뭐, 그렇게 볼 때 구멍을 낸다는 게 그들의 관계를 해체시켜버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ㅡ 아키츠가 그렇게 신통한 인물일리 없다 ㅡ, 야이치와 아키츠의 관계는, 아키츠에 대한 '재미있는 사무라이'라는 관심과 야이치에 대한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야'하는 의혹을 통해서, 확실하게 대조되는 성격과 확실히 대조되는 신념 아래, 그 안에서 비로소 그들의 실체가 천천히 떠오르는 것이다. 사무라이가 나온다고 결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범죄물이라고는 해도 그다지 쫓고 쫓기는 활극을 그려나가는 건 아니고, 사람이 납치되고 협박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이야기는 오히려 여유롭기 그지없다는 게 지극히 오노 나츠메 씨답게 주제에 접근해나간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이기도 하지만, 그 조용하고 건조한 그 공기로 다뤄지는 독특한 스토리가 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저는 이 작품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펑펑 울기도 했고, 작가 분 분위기가 워낙 좋기도 하고. 문제는 역시 역사라는 거겠죠. 저는 26년 같은 팩션 정말 싫어하는데, 어떻게 보자면 이 작품도 좀 더 그럴듯한 기분나쁜 팩션으로 보이기도 하니까요.

그 지점에서 과연 이 작품을 옹호할 수 있을지, 물론 옹호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좋아하는 작품은 좋아할 따름이니까요. 무슨 얘기냐면 감상으로 이야기되는 얘기는, 사실 이 작품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따라서 그 다음에 재구성될 뿐이라는 겁니다. 저는 감상을 그렇게 바라보기에, 사실 감상을 별로 안 믿습니다. 논리적인 감상은 없다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감상이 막 쓰는 글이라는 건 아니고, 제가 이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과 왜 좋아하는지를 접할시킬 묘안이 지금으로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문제는 이 작품이 억압을 더 강화하고 있는지,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인지가 되겠죠. 작가 분은 스스로를 원폭과 관련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망령으로만 남아있는 원폭을 직시하고자 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일본이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강화시키는지, 아니면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인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저는 비교적 후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도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 <벚꽃의 나라>에서는 원폭이란 말만 들어도 고개를 돌렸던 2년 전의 내가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을 그려 보려 했다. 나도 그랬었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100p)

무슨 얘기냐면, 원폭은 특히 피해자 중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심지어는 그 근처에 있었던 ㅡ 바로 작가 분과도 같은 ㅡ 사람들마저도 기묘한 죄의식을 마음에 품게 만들었다는 거죠. 이건 단순히 저녁뜸의 거리에서 미나미가 죽어가는 장면도 혹은 그녀가 느꼈던 그 죄의식만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즉, 벚꽃의 나라로 넘어와서는 현재진행형으로 다뤄지는 테마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 오직 부정되어져야할 정체성에 대해 직시를 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죄의식에 대해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요. 이걸 가지고 일본이 피해자네 어쩌네 할 수 없다고 보는 건, 이건 분명 일본인 안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문제이고, 치열한 문제일 수 있으니까요. 이 작품을 보면서 진짜로 서글펐던 이유는 전반에 깔려있었던 그 죄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나미가 왜 그 마을에서의 추억을 잊어버리려 했는지가 바로 그렇습니다. 또한 미나미의 독백 역시 원폭에 대한, 미국에 대한 단순한 독설만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단지, 그것을 통해서 구체화되었을 뿐이죠 ㅡ 그건 분명 사실이죠. 그러한 살아남고말았다는, 그리고 그들의 피를 이어간다는 죄의식은,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고유의 문제이자 그것이 드러내는 원폭 문제의 핵심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이 작품은 전쟁 문제 이전에 원폭 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것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신성화라거나 억울함에 대한 호소라기보다는 내면화된 죄의식에 관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저는 코우노 후미요 씨가 그 죄의식에 반대한다고 생각하고, 저는 그 반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의 가해자로서의 입장을 숨기려는 게 아니냐는 건데, 이런 입장의 글도 이미 몇 건인가 읽었습니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죠. 저는 어차피 이 작품의 문제의식에 한국인이 반드시 동의해야한다고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본인에겐, 좀 더 범주를 좁히면 히로시마 사람들에게는 치열할 수 있는 문제도, 당장에 우리 자신의 살에 맞닿아 있는 문제조차 아니니까요.

하지만, 뒤집어엎어서 말한다면 작가 분에게 그것이 하나의 억압이고 무거운 짐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바로 그 분노에 겹쳐져 보인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저는 한국인이 일본인을 싫어해야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억압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만, 저는 이 작품에서 주목할 부분이 죽어가는 미나미를 통한 단순한 비극의 환기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ㅡ 즉, 피해자로서의 정체성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피해자라고? 비극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럴까요. 그러니까 좀 더 기본적인 것, 그것은 비극이기 이전에 분명히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마치 없던 것처럼, 아니 없어야 했었던 것으로 치환해버렸을 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없어야만 했던 상상 위에서 현실은 소외되어버리는 거죠. 그런 내용없는 죄의식(혹은 의무). 그리고 거기에서 과거는 스스로를 절대화하고, 사고는 정지하기를 요구하죠.

재미있게도 이 작품이 불쾌하고, 의도를 까발리고 싶어진다면, 그것도 바로 그런 억압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잘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한국인을 짓누르는 것도 일제시대에 자체가 아니라 일본이 무조건 잘못했다거나 일본을 미워해야 한다는 요구에 다름 아니니까요. 어느 쪽이건 사실은 내용이 없어요. 이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던 죄의식에도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일본을 미워해야 한다는 의무에도 말이죠. 남는 것은 의무이고 구도 뿐이죠. 일본에, 그리고 역사에 관련있기만 하면, 한국-피해자, 일본-가해자 구도에 쑤셔넣고 싶어지는 거죠. 그런데,

일본이 피해자라고라!?

피해자로 그려지면 또 어떱니까, 무슨 피해자 강박증도 아니고. 아 피해자적 민족주의란 바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저 테마를 좀 더 한국적으로 뒤집어본대도, 과거에 대한 인정을 통해서 이런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거죠. 죽은 사람은 되돌아오지 않고, 일제시대라는 과거도 달라질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비로소 바라보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이 작품이 과거에 대한 얽매임이 아니라면, 일본을 피해자로 파악하는 것도 가해자로 파악하는 것도 사실은 별 상관없다는 거죠. 논점은 그게 아니거든요.

물론 이 작품이 놓인 맥락을 놓고 생각했을 때, 순전히 그렇게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유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저 역시 이 작품을 온전히 좋아할 수 만은 없으니까 문제인 셈이죠. 저에게 문제가 되는 건 일본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숨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억압을 강화한다는 데 있죠. 어떠어떠해야한다, 는 바로 그겁니다. 무슨 얘기냐면 다른 모든 사고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겁니다. 이를 테면 민족주의에 이걸 적용하면 일본에 대한 옹호가 있을 때, 그것은 의견이 아니라 매국이 되는 거죠. 바로 그렇기에 이 작품의 위치가 고민되는 셈이고,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이렇게 놓고 보면, 제 입장에선 스스로 가해자라는 정체성을 끌고나오는 거야 말로, 이 작품을 최악으로 만드는 지름길이긴 하겠네요. 앞서 26년을 싫다고 이야기했는데 비슷한 거죠. 피해자들의 아픔은 절대적이고, 그 때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는 거죠. 저는 바로 그런 게 싫은 거거든요.

저는, 그러니까 울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이건, 일본 사람이건 작가분이 남겨둔 결말없는 이야기의 마지막장에1, 이를 갈면서 분노하고자 한다면, 작가 분이 남겨둔 이야기의 가능성과는 가장 먼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그 공백은 다름아닌 독자의 삶을 지칭하는 거라고 생각되니까요.

물론 이 이야기가 제 상상이라면,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1 작가 후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죠
Comments
2007-06-29 00:47
출판사쪽에서도 이 책을 낼때 일본에 대한 악감정때문에 안좋은 평가를 받지 않을까 고민도 많이 했었고, 주위에서도 만류가 많았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너무 일본-가해자, 한국-피해자 란 관점에서만 보는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해자라고 하면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가리지 않고 일반민중들 모두가 포함될 수 있겠죠. 좋은글 잘 보고갑니다.
2007-07-01 02:20
스스로 피해자가 되려고 하는건지.., (No comment)
Wk:포에니 전쟁 을 배경으로 한 이와아키 히토시 씨의 역사 만화.

저에겐 여전히 불편한 감은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유레카는 아닙니다만, 그리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히스토리에의 1권 표지에는 주인공 에우메네스가 지구본을 들고 있습니다만, 이런 모습이 아무래도 어색하다는 거죠. 저는 어렸을 적에 대항해시대를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그 게임에는 항해를 통해서 '지도제작'을 할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히스토리에의 배경은 기원전, 그것이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위화감만은 착실하게 각인 된다는 거죠.

     • (...)「ヒストリエ」では紀元前4世紀後半の時点で既に「地球儀」が作られてしまってすが、実際には最古の地球儀は紀元前160年頃に作られたと言われています。それ以前に世界を球体で表そうとする試みはあ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が定かでないのが実情です。
     • (...)「히스토리에」에서는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이미 「지구본」이 만들어져있습니다만, 실제로 가장 오래된 지구본은 기원전 16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 세계가 구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을지는 모릅니다만 확실하지 않은 실정입니다. 1

실제로 어떤지 뒤져보다 보니 이런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기원전 160년에 지구본이 이미 있었다고 하더라도(그리스의 크라테스), 그것만으로도 분명 놀랍기는 한데 그걸 에우메네스가 당연한 듯이 들고 있을 때의 압박은 '역사는 몰라도(!)' 현대인 입장에서 보면 아무래도 어색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닐까요.....?



아니면 말고요. 어쨌거나 그런 인상은 유레카 본편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는데, 아르키메데스가 만들었다는 발명품들의 모습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기묘하고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투석기라거나, 로마군의 배를 갈라버릴 정도로 거대한 톱날. 위의 장면은 거대 기중기입니다만, 뭐 어쩌면 제 자신이 편견 투성이인 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런 걸 순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솔직한 감상이라는 거죠. 저 시대에! 하고. (이건 '비하'라기보다 단순히 한 무식한(?) 현대인의 시대 인식에 관한 보고입니다.)

저로서는 아르키메데스가 무기 개발에도 참여(?)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얘기였고 ㅡ 그러고보면 아인슈타인 무기 개발을 했었다죠, 아마 ㅡ, 꽤나 흥미로웠기로소 찾아봤습니다만,

2


이런 그림을 발견하고, 가슴이 가라앉았습니다. 아! 여기가 현실이구나 하고. 영어는 잘 모르므로 훑어보기만 했습니다만, 몇몇 무기에 관해서는 위키피디아의 Wp:Archimedes 항목에서 다루고 있는 듯 합니다.

링크를 따라가다보면 태양빛으로 배를 태우는 실험을 하는 것 같은 것도 나오던데, 고정된 위치에서 실험된 걸 고려한다면 역시 다밋포스가 여자들을 데리고 언덕에서 가서 거울 빛을 한 곳으로 모은다거나 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뭐 그걸로 사람을 태우겠다는(...) 발상은 재미있었지만요.

그런 부분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역사를 그린다고 하면 역시 '어디까지' 상상력을 발휘하는가 하는 게 문제라고 한다면 그게 진실이건 거짓이건 그런 무모해보이는(그러니까 실제로 무모한지는 모릅니다) 상상력은 분명 볼거리를 제공하고 이야기를 한층 쉽게 만들어 주니까요. 아르키메데스의 새로운 모습이라거나, 다메삐라거나, 다메삐라거나, 다메삐라거나...... 누구냐, 넌? 단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시대성이 주는 인상이 옅어지는 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기생수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것처럼, 고증을 떠나서 역사라고 하기에는 현대인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건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앞서서 이야기한 불편함이란 '불편함이 없는 불편함'이라고 할까요, 히스토리에 쪽에서는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합니다만, 이 이야기의 엔딩이 보여주듯 거기에 대한 방향성이 없다면 치명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죠으니까요.
1 http://pezetairoi.hp.infoseek.co.jp/history/atlas.html
2 http://www.smith.edu/hsc/museum/ancient_inventions/shipshaker2.html
Comments
2007-07-04 20:26
확실히 지구본은, 그렇긴하지..
무기를 만들었다는건 몇번씩 들었던 것 같아서,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