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서 구매하는 김에 같이 구입. 작가 후기에 이 이야기가 과장도 주장도 없는 무상한 이야기라고 써있지만, 굳이 그런 얘기를 해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그 정도 쯤은 알아채지 않을까 싶은데...
혹, 무상하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거라면 그건 날개의 코멘트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학교를 모르는 사람이거나,
혹은 학교밖에 모르는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좋아하는 장소가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확실히 생뚱하기 그지 없는 전개 속에서 사실 이 문구는 그 의미를 근본적으로 상실해나간다. 마치 학교를 부정이라고도 하고 싶은 의지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쩌면 그 내용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 말로 저 코멘트의 이야기가 기반에 깔려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
그런 연장에서 아마 나같은 인간을 학교에 가둬둔다면, 아마 언제까지고 학교를 어떻게 뒤엎어버릴지 그런 고민만 할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누군가가 그랬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겐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는 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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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뭐랄까, 꾸준히 그렇지만 이 작가의 작품이 참 기분 나쁘다. 물론 어떤 의미에선가 기분 나쁘다는 건 그만큼 강렬하고 사랑스럽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기분 나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이 작품을 엔터테이먼스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사정이 기분 나쁘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일본을 싫어한다. 일본을 증오하고, 이 작품은 다분히 그런 의미에서 지독하게 기분 나쁜 작품인 거다.
TV가 재수없다는 얘기는 간간히 하곤 했지만, 일본만큼 TV와 잘 어울리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한국의 TV에는 특히 공중파에는 자신들이 품고 있는 이상의 높이가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를 다분히 보여준다. 그렇게 보자면 한국의 TV에는 망상이 담겨져있다. 드라마에도 맨날 잘 사는 사람밖에 안 나오고. 광고도 끝내준다. 천박한 광고는 근본적으로 단절되며, 공중파에서는 특히나 그 경향이 심하다. TV의 특성은 그런 면에서 볼 때 제약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은 뭐랄까, 그런 제약 없이도 TV에 투영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완결된다. 일본의 TV 방송들의 천박성은 한국의 그것에 비교해보자면 그 정도가 장난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천박함을 어느 정도 전제로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을 한국에서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재미있다. 일일히 자막까지 만들어가면서.
그것은 정말 익숙해지기 쉬운 거다. 처음에는 그것을 볼 때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어쩌면 그런 면이 신선하거나 이런 걸 TV에 내보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나서 보면은 별로 상관없는 거다. 내 생각에 일본의 방송국들은 그런 걸 한국 방송국들보다 좀 더 잘 알고 있을 뿐이다. 천박한 것은 방송되어져서는 안 된다. 이전에도 얘기했지만 TV란 욕이 없는 세계이다. 물론 욕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런 제약들이 갈 수 있는 극한까지 가보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TV일 수 있는 그런 경계까지.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는 성인만화라고 볼 충분한 작품임에도 성인 마크가 달리지 않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런 것과도 비슷한 거다. 그것은 TV에서 다룰만한 것인가?
답은 그거다. TV에서 다루지 못할 만한 것은 없다. TV는 평균적인 세계고 그런 망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일본 방송들이 천박해지는 동안, 그런 천박함이 평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착실히 평균으로 수렴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천박한 일본 엔터테이먼트 방송과 고귀한 교양방송 컨셉을 끝까지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한, 어쩌면 여느 한국 공중파 방송보다 더더욱 그러한 NHK와 근본적인 방향성의 차이는 없다고 보인다. 둘 다 다분히 일본적인, TV스러운 증상인 거다.
그거 말고 오히려 일본이 한국보다도 더 철저한 규약을 두는 게 있다잖은가? 시간이다.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게 시간표를 지키지 않는 거고, 그것이야말로 시청자에 대한 예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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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 이신 씨의 작품이 가져오는 불쾌감이란, 그런 증상의 정반대적인 면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경유적이다. 이것은 거의 100% 그러한 TV적인 다분히 평균적인 세계를 경유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헛소리 시리즈의 주인공 이짱은 사실 평균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아니, 그것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야만 하는 인간이다. 그 거리는 어떻게 측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 방법은 평균이라는 지점으로부터 그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다. 그 개성이란 평균에 대한 아무런 고려도 없는 개성이라기보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다름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오히려 너무나도 강하게 '평균으로부터 그려지는' 인물인 셈이다. 그럴 필요가 있는 거다. 이 작품을 종이 위에 놓고 표현한다면, 이짱이란 평균에서 한참 동떨어진 어딘가의 지점이고, 그리고 이짱의 헛소리가 다름 아닌 그 둘 사이를 긋는 직선인 셈이다. 아니,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혜성이 있다면, 태양으로 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와 가장 먼거리 사이를 무한히 왕복하는 선이다. 그러니까 이짱의 존재는 자신의 지점이 아니라, 그 궤도로서만 존재하는 거다.
그리고 그 궤도로서, 이 작품은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평균없이는 존재조차 할 수 없는 개성인 거다. 그런 의미에서의 의존성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서 처음 그런 한없이 기분나쁜 의존성을, 한없이 기분나쁘다고 느낌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거다. 그러한 궤도로부터 아무리 멀어져도 그것은 평균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평균-일본 사정에서 이 작품은
훌륭한 엔터테이먼트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그 지점을 하나의 개성으로 볼 수 없으니까, 그것을 언제까지고 다시 돌아오는 궤도로밖에 바라볼 수 없으니까. 평균에서 가장 먼 지점조차도, 평균스러운 거다. 이건 일부러 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일본적인 특수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이런 괴상스런 결과물이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를 테면, 사이조 타마모. 내가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사람하고 있으면 해야만 하는 말, 해야만 하는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등장해서 이짱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이조 타마모는 근본적으로 그런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비상식적인가? 내 생각에 그것은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상대방을 신경쓰지 않고서 자신에 맥락에 무조건적으로 상대방을 포획하는 그런 폭력은 그녀의 존재를 비상식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하기는 하지만, 이거야 말로 평균으로부터 반환된 특성인 거다. 지극히 평균적인, 평균에 대한 배신으로서. 즉 이건, 예상 가능한 배신, 그림의 음화와도 같은 거다. 사이조 타마모의 행동은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 아니라, 상식을 벗어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제시된 행동이다.
그런 일본이야 말로 무상한 나라다. 중요한 일? 그런 건 없다. 재미없어지면, 채널을 돌리면 될 뿐.
평균적이라는 특성의 전제없이도, 이 시리즈가 이만큼 재미있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일 수 있는 건 이 작품에 대한 공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지 이런 전제가 이 작품에서 재미있는 지점을, 그렇게 구멍을 내는 거라고 생각한다. 난 사실 이런 전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에, 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좀 많이 황당했다. 그 얘기도, 예전에 블로그에 쓴 것 같은데, 찾아보면 나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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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쓰고 싶은 얘기가 더 있었는데, 통닭 먹고 왔더니 까먹었다. 냠냠. 생각나면 계속...